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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나가르주나와 중관철학
/조 수 웅 문학박사
2017년 11월 27일(월) 00:00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논의가 필요했다.
종교는 붓다나 예수 같은 특정한 인물이 풍기는 카리스마, 또는 무하마드 같은 강력한 지도력 등을 통해 등장하지 치밀한 이론에 의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 같은 식의 이야기로는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 논리적 설득력을 채워주지 못해, 철학적 논의가 대두된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 불교철학, 이슬람철학과 같이 초기 종교에 철학이 생겨난 것이다.
대승불교도 처음 시작은 종교운동 중의 하나였다. 대승불교의 경전도 철학적으로는 단순한 ‘이야기’ 정도였지 결코 체계적인 논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이론적인 작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서 대승불교에 걸 맞는 철학적인 사유가 대두하는데 그 때 등장하는 사람이 나가르주나(龍樹)다.
나가르주나가 수립하는 중관철학이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A.D 2~3세기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추측되는 나가르주나의 저작으로는 ‘중론’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많은 주석서가 쓰여 졌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다. 또 ‘십이문론’, ‘공칠십론’,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대승이십론’ 등이 있으며 이 저작들에서 나가르주나는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각가지 실재론들을 철저히 논파하고 있다.
보통 리얼리즘을 구사하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논파한다. 특히 중론은 A.D 2~3세기에 나온 책 중에서 가장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입문불교경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 라고 함으로써,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법들을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승불교는 제법 자체는 실재라고 보는데 대승불교는 인연이 먼저다. 제법들이 있어 그것이 인연, 연기하는 게 아니다. ‘연기’becoming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 ‘제법’이다. 결코 실체들이 아니라 공이다.
또한 그것을 가리켜 가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 자성self-identity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이름을 붙인다. 도덕경 무명無名, 천지지시天地之始 유명有名, 만물지모萬物之母처럼 개별화할 때에 이름이 붙는다. 엄밀히 말하면 이름을 붙임으로써 개별화되는 것이다.
예컨대 경상도, 전라도로 나누지만 원래 땅에는 그런 경계도 이름도 없다. 그냥 땅이다. 그게 개별화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이름을 붙임으로써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성self-identity의 본명은 가명에 불과한 것이다. ‘역시중도의’ 역시 그건 중도의 뜻이다. 그래서 나가르주나가 이야기하는 것은 중도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중도는 원래 붓다 자신이 이야기한 것이다. 그 중도가 바로 비유비무의 지혜다. 실체론적인 유도 아니지만 전적인 무도 아니라고 함으로써 공의 반야, 진리를 분명히 했다.
소승불교와는 달리 나가르주나는 다르마(法)도 실재하지 않으며 인연이 먼저임을 강조한다. 즉 법法은 인연의 계기일 뿐이라고 설한다. 그렇다고 세계가 무인 것은 아니라했다. 색즉시공 공즉이색色卽是空 空卽是色에서 색즉시공도 중요하지만 공즉시색 또는 중요하다고 했다. 공은 무가 아니라 연기하는 그대로의 세계인 것이다. 불변의 유有도, 죽음에 의한 무無도 거부하고 중도를 강조한 붓다의 생각을 이어받은 것이고 그래서 중도의 길은 비유비무의 세계다.
나가르주나가 구사하는 이 방법이 귀류법reduction to absurdity이다. 귀류법은 원래 희랍철학에서 나온다. 엘레야 학파 제논이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쓴 방식이다.
변화가 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이런 모순에 빠진다. 그러니까 상대방 주장이 맞다면 모순인 것을 보여줘 오류로 귀착시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생生, 멸滅, 상常, 단斷, 일一, 이異, 래來, 출出 8개 개념을 귀류법으로 논파한다. 생이라고 해 보자 그럼 이런 모순이 생긴다.
멸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런 식의 개념은 세계의 진상을 파악한 게 아니라 인간이 언어를 통해서 실재화, 실체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기 즉 공의 세계는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상不常, 부단不斷,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래不來, 불출不出의 팔불八不의 세계인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에 뭔가가 태어난다고 생각하지만 불생이다. 이런 식의 팔불의 세계 즉 불이不二의 세계다. 불이의 세계는 비유비무다. 이분법, 이항대립법을 논파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은 진리이고 공이 아닌 것은 거짓이라는 것도 논파하는 일체무소득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가르주나가 개념적 인식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진리의 길에서는 운동과 다多는 환상이라고 부정하고, 억견의 길에서는 변화와 다多를 분석한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는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가 명확히 양분되지만, 나가르주나 중관철학은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가 날카롭게 양분되는 것은 아니다.
/조 수 웅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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