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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3(월) 18:07
꾸란의 해석에 대한 문제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2018년 04월 16일(월) 00:00
이슬람 신학은 꾸란을 1차 근거로 하며, 무함마드의 말과 행위를 기록해 놓은 하디스(전승), 두 텍스트에서 연역, 추론해 내는 키아스(추론), 마지막으로 텍스트 어디에도 기대기 힘든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율법학자들의 이즈마(합의)를 2, 3, 4차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꾸란에 근거하고 꾸란에 없는 얘기는 하디스에 근거하고 거기에 없는 것은 꾸란과 하디스를 근거로 삼아 추론하고 그것도 안 되면 율법학자들이 합의를 보는 것이다.
이슬람의 변증론 신학, 수니파에서 하는 스콜라적인 주석학을 ‘칼람’ 이라고 한다.
칼람은 무타질라파와 아쉬아리파로 양분 되는데, 무타질라파는 무슬림의 문화적 엘리트들로 구성이 되고 정통파 이슬람의 공식적 교의의 성격을 띤다.
무타질라파는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긍정했다. 그러니까 중세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던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의 하나가 신과 세계의 관계다.
신과 세계를 불연속적으로 보느냐 유추관계, 연속적으로 보느냐 문제다. 그 다음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문제다.
온 세계가 신의 섭리로 지배된다면 예컨대 누가 사람을 죽여도 그것도 신의 섭리다. 그래서 신의 뜻이니까 책임질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어떤 시대든 그 시대의 철학적 문제가 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중요한 화두가 있는데 중세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화두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의 문제, 윤리의 문제다.
이 문제에서 칼람, 무타질라파는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긍정했다. 그리고 무타질라파는 신의 속성을 규정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신의 속성들을 규정하는 것, 예컨대 신은 완전하다, 선하다, 아름답다 등 속성을 규정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규정들이 신의 유일성을 해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탁자를 보면 갈색, 네모난 것 등 속성이 여러 가지 있듯이 신도 여러 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에 대해 뭐라고 하면 그 자체가 신을 규정하는 거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공유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냥 신이 신이지, 신이 성부가 되었다가, 성자가 되었다가 성령이 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쉬아리파는 무타질라파의 이성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꾸란의 불가해성과 신비를 그 자체로써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주의자들이다. 그러니까 꾸란도 인간이 이성적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쉬아리파는 꾸란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신이 무하마드의 손을 잡았다. 이런 구절이 나온다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신한테 손이 있다면 육체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신도 손가락이 5개인가? 하는 식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타질라파는 이걸 해석하는 것이다.
‘이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표현한 거다’,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아쉬아리파는 ‘아니다, 무조건 꾸란은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라고 한다.
이런 입장을 문자 그대로, 축자적literalism이라고 한다. 예수가 강물을 건넜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실제 그렇다는 것이다. 축지법을 써서 이렇게 건넜다는 것이다. 그게 축자적literalism이다.
요약 정리하면, 이슬람 신학은 꾸란을 근거로 하며, 무하마드 말과 행위를 기록한 하디스(전승), 이 두 텍스트에서 연역해내는 키아스(추론), 어디에도 기대기 힘든 문제는 율법학자들 이즈마(합의)로 한다. 수니파에서 하는 스콜라적인 주석학이 칼럼인데 이 칼럼은 무타질라파(무슬림 문화적 엘리트들, 이슬람 공식적인 교의의 성격)와 아쉬아리파로 양분된다.
중세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나는 신과 세계를 불연속으로 보느냐, 연속적으로 보느냐 문제다. 무타질라파는 신의 초월성,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긍정한다.
또 신의 속성 규정을 금(禁)한다. 아쉬아리파는 무타질라파의 이성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꾸란의 불가해성, 신비를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이 글은 이정우 교수 ‘아트앤스터디’ 수강록에서 발췌·요약·첨삭한 것임을 밝혀둔다.)
/조 수 웅 문학박사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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