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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1(수) 18:29
들뢰즈의 ‘마주침’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2020년 06월 01일(월) 00:00
/조 수 웅 문학박사
들뢰즈가 쓰는 말에 ‘마주침’(불어rencontre, 영어encounter)이 있다. 우리가 만나는 사물들은 우리에게 내부화되었기 때문에 사물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만났지만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미 우리 지각체계 속에, 우리 기호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상징계 속에 또는 기호체계 속에 순치된 것들만 만났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물을 만난 적이 없고, 어떤 기호sign을 만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세계를 완벽하게 우리의 상징계 속에 넣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진정한 경험은 마주침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주를 마실 때는 이미 맛을 알고 있기에 기대하고 먹는다. 그래서 마셨으나 마시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런데 외계인이 처음으로 소주를 맛보면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에서 말하는 ‘마주침rencontre’이다.
이 마주침 때의 기호sign가 ‘징후symptomes’이다. 그 징후는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 경험의 차원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것이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에서 말하는 ‘마주침rencontre’이다.
칸트에게도 타자가 있다. 칸트는 근대 주체철학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체가 구성하고 종합한다는 철학자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에게는 ‘주체의 내부화’라는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도 타자는 있다. 물자체이다.
칸트에 의하면 주체를 구성하고 종합해낼 수 있는 것은 현상계뿐이다. 우리에게 나타난, 우리가 감각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현상계만 종합하고 구성할 수 있다. 사물 그 자체(thing itself), 사물의 본질은 영원히 우리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자체는 타자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영원히 안 들어오는 저편, 물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에게는 분명히 타자가 있다. 이 것을 강조하는 사람이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타자는 현대철학이 말하는 타자와는 다르다. 현대철학이 말하는 타자는 우리 이성의 빛이 비치는데 까지는 들어오고, 그 다음은 어둠이라는 칸트식의 타자가 아니다.
현대철학에는 현상계와 물자체 사이의 경계선은 없다. 물자체라는 세계의 본체 같은 것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상징계 위에서 우리는 모두 그물 지워지고 기표화되어 있다. 말하자면 보았으나 본 게 없는 세계에서 출몰하는 타자이다. 외부성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시티라이트’의 첫 번째 장면이 동상 제막식이다. 거기에는 군인들, 정치가들, 관료들이 모여 있다. 그 엄숙한 순간에 동상은 무거운 상징체계 역할을 한다. 동상에는 애국심, 충성심, 군인의 용기 등 많은 가치를 부여받고 묵직하게 군림하는 하나의 심볼이 있다. 그 동상의 제막식에서 막을 걷는 순간 한 거지가 하얀 대리석과 대조되는 까만 옷을 입고 자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이미 조직하고 있는 그물망을 찢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외부이다. 칸트가 말하는 타자와는 뉘앙스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 이야기를 다른 말로 바꾸면, 니체 등 생성 존재론자들은 전체로써의 바깥(물자체)은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초월성의 사유가 아니라 내재성의 사유다. 물자체라는 초월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재성을 초월하는 바깥이 아니라 내재성 안에서 수시로 드러나는 외부들, 타자들을 사유하려는 것이다.
세계의 어디까지는 환하게 드러나지만 그 바깥은 전혀 안 드러나는 그런 구도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세계는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드러남과 숨음, 길들여짐과 길들여지지 않음이 내재성 안에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는 훤히 알지만 그 바깥은 모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의 절대 바깥은 없다. 내재성 내에서 무수한 외부, 타자들이 얼굴을 들이민다. 현대철학은 그런 경험들을 중시한다. 그것들이 들뢰즈가 말하는 ‘마주침rencontre’이다.
생성 존재론에 타자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현실 저편에 있는 무한이 아니라 현실의 여기저기에서 돌출하는 타자들이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이성의 거미줄은 모든 것을 낚으려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 거미줄, 그물에 구멍을 내면서 솟아오르는 리얼리티, 그런 타자성, 그 외부성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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