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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9(화) 16:05
매화꽃처럼 살았던 백기완 선생을 보내며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2021년 02월 22일(월) 00:00
[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재야인사 백기완 선생’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민주와 자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를 보내지만 불의에 맞서던 그의 선하고 순수한 용기와 열정은 보낼 수 없다.
찬바람 속에서도 매화꽃이 피어나던 날에 매화꽃처럼 세상을 살았던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다.
이름 앞에는 ‘재야인사’를, 이름 뒤에는 ‘선생’이라는 단어를 달고 늘 약자의 곁에 거목으로 섰던 백기완 선생이 지난 15일 타계했다.
‘제도권 바깥에 있는 정치세력’이라는 뜻의 ‘재야’라는 말을 처음 쓴 선생은 평생을 일관된 재야인으로 살았다. 그 흔한 정부의 위원회에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위원회에 참여하면 전문가 인양 이름도 날릴 수 있고, 푼돈의 용돈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재야인이야 들풀처럼 많았지만 선생처럼 오롯이 외길 재야인으로 산 사람은 드물다. 그가 걸었던 외길은 민주·통일이었고 민족과 백성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다.
모두들 제도권 권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거나, 재야를 제도권 진입의 사다리로 사용할 때도 그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한일협정 반대 투쟁과 3선개헌 반대, 유신철폐 운동 등 민주화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군사정권의 고문으로 죽음의 고비를 숱하게 넘겼고,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각종 집회 때마다 앞자리를 지켰다.
황해도 은율군 구월산 자락에서 태어난 선생은 열세 살 때인 1946년 아버지를 따라 삼팔선을 넘었다. 그는 서울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면서 민족분단의 현실에 눈을 떴다.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백범의 사상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정규교육이라고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영민함은 우리들의 일상어에도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새내기’나 ‘동아리’ 같은 우리말을 발굴해 보편화시켰고, ‘달동네’라는 말도 처음 사용했다.
그는 1998년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950년대 중반 서울 남산의 산동네에서 야학운동을 할 때 당시만 해도 일본말로 ‘하꼬방동네’라고 불리던 곳에서 ‘달동네 소식지’를 만든 후 달동네라는 단어가 점점 널리 쓰이게 됐다”고 썼다.
황석영이 쓴 것으로 알려진 ‘님을 위한 행진곡’도 실제는 선생이 감옥에서 쓴 ‘묏비나리’가 원작이다.
그는 1979년 유신철폐를 위한 ‘YWCA 위장 결혼사건’을 주도했다가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수개월 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선생은 생전에 “당시 고문으로 10시간가량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후 ‘이렇게 죽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다해 쓴 시가 ‘묏비나리’”라고 밝혔다.
차디찬 독방의 시멘트 바닥에 누어 필기도구도 없이 입으로 지어 외운 끝에 나온 장시다.
백 선생은 1987년 6월항쟁 후 열린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재야 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추대됐다. 김대중(DJ)과 김영삼(YS) 두 후보의 야권 단일화 압박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DJ와 YS의 양 김 분열을 막지 못하자 후보를 사퇴했다. 그는 자칭 ‘울보’라 할 만큼 약자 앞에서는 눈물이 많고 지극히 부드러웠지만 잘못된 권력 앞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추상같이 살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자유당 때부터 독재와 싸워 왔지만 그 중에서 내 앞을 가장 가로막는 게 이명박”이라고 했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 됐다면 민중의 얘기를 요만큼이라도 들어야 하는데…”라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 때에도 그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광화문 현장을 지켰다.
선생은 말년까지 노동자, 농민, 철거민 등 이름 없는 약자를 위한 집회나 정권의 악행을 규탄하는 현장에는 제일 먼저 달려갔다.
박종철(고문치사), 강경대(백골단 의한 사망) 열사 집회는 물론 용산참사 규탄 현장에도,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그는 선봉에 섰다.
날 선 추운 바람에 피어나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처럼 평생을 살았던 그가 갔다. ‘재야인사 백기완 선생’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민주와 자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를 보내지만 불의에 맞서던 그의 선하고 순수한 용기와 열정은 보낼 수 없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꽃같은 그대 그리움/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폭설은 퍼붓는데/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라고 노래했던 도종환의 시처럼 “꽃같은 그대 그리움”이 벌써 매화꽃처럼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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