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세계文化(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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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2-06 00:37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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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고려대장경





文化(문화)유산 기록유산 유네스코 승정원일기 화성 석굴암 불국사 고려대장경 조선왕조실록 / ()
문화유산 기록유산 유네스코 승정원일기 화성 석굴암 불국사 고려대장경 조선왕조실록
순서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따
불국사
문화유산 기록유산 유네스코 승정원일기 화성 석굴암 불국사 고려대장경 조선왕조실록 / ()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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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세계文化(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레포트 > 사회과학계열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따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따
설명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
승정원일기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